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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Re: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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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철희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4-11-0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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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면허에서 탈출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운전대를 잡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졸아들곤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멀리 떠나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악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거나 옆차선 넘지 않고 우회전, 좌회전 하는 것은 웬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옆에서 끼어드는 차들에 마음 졸이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된다. 앞차에 바짝 달라붙는 게 익숙하지 않은 초보 운전자 앞으로 네이버 영문주소 변환기 쓰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잠깐 벌어진 틈을 타 대가리부터 쏙 들이미는 차들에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나면, 짜증이 밀려든다. 따라붙어 클락션이라도 울려주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끼어들곤 비상깜빡이를 켜는 차들이 더러 있다고요. 그러면 갑자기 만세력 보기 하면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른바 ‘비깜 사과’로, 비상깜빡이를 두세 번 켜는 것은 ‘미안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라는 뜻이 담긴 운전자들의 암묵적인 신호라고 한다. 아반떼와 코나는 미간이 좁고 눈꼬리가 올라가 어딘가 표독스러워 보인다. 티볼리나 옛산타페는 철없는 사촌 동생처럼 깐족댈 것만 같다. 그런 얼굴로 끼어드니 화날 수밖에. 하지만 막상 네이버 신년운세 보면서 그런 차를 모는 사람을 떠올리면 예상했던 이미지와 달라 무안한 순간이 많아요. 비상깜빡이는 차들의 심술궂은 얼굴 너머 그것을 누른 운전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비상깜빡이 사과에 감동을 받는 이유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했습니다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어차피 저 운전자는 소비자보호원 신고 후 몇 초만 지나면 헤어져 다시 볼 일 없죠. 일본에서 유래했다지만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만국공통이면서도 효과적인 셈이다. 운전을 하다 보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운전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자진퇴사 실업급여 신청 하는 것도 무의미 하다. 상대 운전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고, 별 생각없이 한 행동도 공격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운전자들은 앞차의 뒷모습, 두 후미등과 브랜드 로고, 번호판이 각각 눈코입을 맡아 만드는 얼굴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특히 도로만큼 오해가 많이 생기는 곳은 SNS 공간인 것 같다. 온라인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죠. 그래서 상대가 보낸 메시지의 저의를 자꾸 넘겨짚게 된다. 이 공간에서는 한순간에 배려가 간섭으로, 걱정이 감시로, 호기심이 의심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별생각 없이 던진 전기제품 사용량 계산 메시지에 날카로운 클락션이 날아든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경험이다. 일을 할 때도 그렇다. 꼼꼼한 것은 때론 무례한 것이 되고, 효율적인 보고에서 게으름이 읽힌다. 평소 얼굴을 잘 아는 사이에서도 그런데, 새로 가까워진 취재원이나 갓 입사한 막내들과 말을 주고 받을 때면 특히 더 신경이 쓰인다. 물론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들 끝엔 ‘그냥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게 제일 낫다’는 원시적인 해결책만 남는다. 주민등록초본 인터넷 발급 같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뉘앙스와 맥락을 파악해내는 우리 본연의 능력은 많은 오해를 순식간에 불식시켜왔어요. 다행히 SNS 공간에선 프로필 사진을 설정해둘 수 있다고요. 서로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부끄러워도 웃상인 얼굴 자꾸 걸어놓으려는 것에는 말이 왜곡되지 않고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요. 그래도 텅 빈 프로필보다는 오가는 말을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지론이다. 그나저나 중소기업확인서 발급방법 하면서 날이 쌀쌀해지며 여름철 내내 걸어두었던 사진을 내렸는데, 살찐 뒤로 찍어둔 사진이 없어 난감한 요즘이다. 윤 정부는 어리석게도 보유세 양도세 상속세를 다 내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거든요. 병사 월급 200만 원처럼 돈을 써서 긍정적인 효과가 나기는커녕 군의 기간(基幹)인 초급 장교와 부사관의 대거 이탈을 초래하는 정신 나간 지출도 적지 않다. 한국전력 고객센터 전화번호도 그렇고 세수 결손이 발생하면 국채를 발행해서 세입-세출이라는 대차대조표상에서 해결하는 것이 정상이다. 윤 정부는 결손을 메꾸기 위해 외평채 기금 등 각종 공공기금에 손을 대는 나쁜 버릇까지 들였다. 지난해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또 그러고 있거든요. 그 정도가 아니다. 이제는 공적보험까지 하고 있거든요. 무리한 의대 증원 밀어붙이기를 수습하느라 의료 수가 조정 등 뒷북 개혁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기로 하면서 국민건강보험이 당기 수지로는 내년부터 매년 1조 원 이상의 코로나 예방접종 적자가 예상된다. 적자가 누적되면 결국 개인이 내는 건강보험료의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큼직한 사건을 다루는 국회의 국정감사에 대한 보도가 모든 언론 매체를 꽉 채운 듯한 요즈음 나는 21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이번 국정감사 중에 국회의원들이 증거자료로서 녹취록이나 파워포인트(PPT)를 연일 보여주었다. 21년 전 본인서명 사실 확인서 인터넷 발급 하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국회의 대정부질의 때 나의 국가보안법 위반 에 대한 중요한 증거라고 하면서 디스켓 하나를 복사한 종이 한 장을 흔들며 보여주었다. 디스켓의 양면 사진을 종이에 복사를 해서 증거물이라고 보여주었기에 그는 이 일로 대표적인 ‘컴맹 정치인’으로 불렸다. 검사나 판사 대신에 차라리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법 운용이 이제 사회적 정의와 법을 지키는 길이 될 수 있다고요는 냉소 섞인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법복을 입은 인공지능 이렇게 변화하는 정보사회의 기술적 조건에 대한 정치인의 한컴오피스 2020 무료설치 이해를 보면서 그동안에 일어났던 우리의 생활세계 변화에서 인공지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문법이나 맞춤법과 같은 저술작업에 등장하는 문제 해결 때문에 가끔 인공지능에 의지하는 나 자신도 인공지능 덕분에 산업과 경영, 금융과 유통, 언론, 교육, 보건, 노동, 예술 분야에서 그동안 일어났던 많은 변화와 흔적을 종종 느낄 수 있다고요. 그러나 인공지능이 수많은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내린 판결이 단순하게 법 적용에만 머무르지 않고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측면, 또는 해당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래서 로봇 판사가 과연 설날 대체공휴일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데는 회의와 논박이 따른다. 여기에서 특별히 제기되는 문제는 인공지능이 사실관계의 확인과 판단을 내리는 모든 과정이 ‘암흑 상자’에 들어 있어 이에 쉽게 접근할 수 없어요는 점이다. 가령 인공지능 판사가 내린 판결에 불복해서 피고가 항고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판결이 나왔는지를 알 수 없을뿐더러 이의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투명성과 함께 또 문제되는 것은 인공지능이 지난 판례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그 속에 들어 있는 과거의 인종주의적, 종교적 또는 토요일 진료 병원 까지도 학습, 이에 기초해서 판결을 내릴 위험성이 크다는 점이다. 인간 지능보다 더 세련되고 빠른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 수준을 넘어서는 특이점이 언제 올 것인지를 두고 ‘구글’의 기술 부문 책임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에서 현재 인공지능의 발달 속도를 고려할 때 이 변곡점의 시간을 대략 2045년으로 예견하고 있다고요. 초인공지능과 전도된 인간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결국 정신적, 육체적 영역에서도 인간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 우리가 기존에 지녔던 인간상에 대한 생각을 넘어선다는 뜻에서 ‘트랜스 휴머니즘’을 설파한다. 고통과 질병, 장애와 노화 같은 인간의 숙명적인 조건도 생명과학과 게놈과 나노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약속한다. 인간존재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이런 2025년 손없는 날 같은 생각은 물론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규제는 현재 인공지능의 무서운 팽창 속도를 고려한, 의미 있는 국제적인 대응이기도 하다. 2023년에 전 세계 인공지능시장의 규모가 약 2000억달러였는데 연평균 성장률이 30~40% 이상이 되어 2030년에는 약 1조달러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규제가 인공지능 개발의 연구자나 투자기업, 이 분야의 주식 거래자에게는 희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인공지능이 불러올 미래의 세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전망을 정리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인 인간을 부리는 전도된 상황에 대한 비판은 항상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완성도를 높여가는 기술과 인간의 불완전함 사이에 벌어진 차이를 반운동의 선구자였던 철학자 귄터 안더스(1902~1992)는 ‘프로메티우스의 간격’이라고 불렀다. 이런 간격으로 생긴 열등감 때문에 인간은 오히려 기계가 되고 싶어서 안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로 만든다고 그는 비판하면서 ‘우리는 기계적으로 유치하게 되어간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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