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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대의 기억 속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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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경녀 댓글 0건 조회 654회 작성일 01-08-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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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과거의 터널을 거슬러 거슬러
어디까지 되돌아 가실 수 있으신지요...

뒷걸음질한 제 기억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반질반질 윤이 나게 잘 닦이고,

뒤뜰쪽 작은 여닫이 문은 반쯤 열린 채 까딱까딱 졸고 있는
아주 넓은 조청빛 대청마루입니다.

그리고 그 대청 끝...
툇마루로 이어지는 문턱 기둥을 붙들고 서서
한 쪽 발을 든 채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는
하얀 옷의 아기가 보입니다.

몇 올 되지 않는,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힘들여 우느라 빼질빼질 비어져 나온 땀에 젖어
작은 이마에 붙어 있군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를 가볍게 어루만질 때마다
아기는 시원하다고 느낍니다만 울음을 멈출 순 없습니다.

발이 몹시 아프고 화끈거리거든요...

드디어 엄마가 바깥채에 딸린 작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고
대청마루 옆 안방에서도 아주머니가 나오십니다...

두 분은 왜 그러느냐고 번갈아 어르시지만
아직 말을 못하는 아기는
발이 아프다고 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요.

아픈 곳을 얼른 몰라주는 엄마가 답답해서
아기는 아픈 발을 높이 들며 더 큰 소리로 울어댑니다...


* * *  골목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여다 보게 된
어느 집안의 한가한 오후 한때 풍경 같기도 하고,
제가 주인공인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한...

일관된 줄거리와 소상한 느낌이 있는 이 기억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도 되감기 하는 비디오처럼
제 머리 속에 무시로 펼쳐졌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날까... 
그 아기가 혹시 나인가... 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일곤 했지만,

말도 못하는 아기 적 일을 제가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건
자신도 믿을 수 없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지요.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봄볕이 따사롭던 어느 날, 엄마와 마당에서 분갈이를 하다
마침 그 생각이 나서 여쭈었더랬습니다.

이따금씩 그런 장면이 떠오르는데 혹시 거기에 관해
아는 게 있으신가구요...

엄마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 기억이 나느냐시며
[ 네가 돌이 되기 전쯤, 발을 벌에 쏘여
  한동안 고생한 일이 있었다 ] 고 그러시더군요.

저도 놀랐습니다.
[ 그게 바로 너였다 ] 는 엄마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마치 오래 맞추지 못하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까지 꼭 끼워 맞춘 듯
마음은 후련해졌지만,

평소 그다지 신통치도 못한 제 기억력은
어째서 굳이 그 아기 적 어느 날의 한 장면을 선택하여
내 것인지 확실치도 않으면서 20년 동안이나 간직하도록
강요했던 것일까요...

제 자신조차도 수긍하기 어려운 먼 기억이었던지라
그 작은 사건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어떤 심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곤 했습니다만,

외부로부터 가해온 최초의 물리적 고통이라든가 하는
어설픈 가설 외에 딱이 짚이는 심오한 이유는 없지 싶습니다.

찌개 한 냄비 끓이고 나면 간 본 숟가락이 최소한 세 개를 넘는
저의 건망증과 치매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렇게 긴 세월,

이마를 스치던 바람의 시원함,
아픈 곳을 몰라주어 답답하던 마음,
아주머니와 엄마가 저를 부드럽게 어르는 소리까지
바로 어제 일인 듯 그 느낌마저 생생히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제게 풀어지지 않는 불가사의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제 머리 속에 임자 없이 떠돌던
기억 한 조각의 주인이 과연 바로 저였다는 사실은,

제 아무리 잊고 싶은 사람,
잊고 싶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제 기억과 망각의 어느 편에 세울지 선택하는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는 현실을 아주 단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다시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고통스런 시간들이
늘 생각의 앞자리를 차지하여 가슴 저미는 일 허다하니,

사람의 기억력이란 어쩌면 그렇게도 일방적이며
인정머리 없는 것인지요...


* * *  이렇듯 제가 더듬어낼 수 있는
저의 첫 기억에 없어서는 안될 악역(?)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한몫해낸 벌은 어릴 적부터도 친근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벌을 몇 통씩 치셔선
자손들에게 꿀벌과 애벌레의 익사체가  [ 나 진짜 꿀이에요 ] 하듯
알리바이처럼 드문드문 떠있는  [ 꿀 ] 을 나누어 주시는 걸로
소일 삼으셨었지요.

아카시아가 꿈결처럼 달콤하게 무리지어 흐벅질 때나
뿌연 밤꽃이 비릿한 내음을 아련히 풍길 때쯤...

저는 할아버지가 벌 치시는 곳으로 놀러 가서는
꿀통에서 잘라낸 벌집을  [ 꿀껌 ] 이라 부르며
단물이 빠지고 뻣뻣해져 이가 아파질 때까지 씹었습니다.

보실보실 노란 털로 덮인 줄무늬 팬티에
빵빵한 엉덩이의 꿀벌들이 잉잉거리며 귓가를 스칠 때면
귓볼이 잠시 시원해질 정도로 날개짓이 힘차서 겁이 몹시 났지만,

할아버지가 벌통을 여실 때마다 햇살 속에 반짝이며 드러나는
질서정연하고 풍요로운 작은 왕국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벌통 들여다 보기를 즐겼습니다.


* * *  자연 상태에서 꿀벌들의 분봉(分蜂)은
하나의 꿀벌 왕국이 번성의 절정기에 달했을 때
일련의 의식을 거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왕국을 주도하던 늙은 여왕벌은 태평성대의 시기에
느닷없이 분봉을 결정하고 자신이 일구었던 모든 것 -
안락한 궁궐, 알뜰히 비축해둔 꿀·밀랍·꽃가루·로열젤리 등 - 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일벌들을 거느린 채 떠나
낯선 곳으로 가서 다시 새 터전을 닦는다지요.

늙은 여왕벌이 떠나고 수분 후,
왕국의 깊은 곳에선 각자 주어진 임무를 본능으로 간직한
어린 벌들이 속속 잠에서 깨어나 서둘러 임무를 수행합니다.

비생식 일벌들은 생식벌인 새 여왕벌이 탄생하는 것을 돕는데,
가장 먼저 알에서 깬 무녀리 암벌은 무엇보다 먼저
곧 이어 깨어날 다른 암벌들을 죽이기 시작한답니다.

아직 알에서 나오지 못한 자신의 자매에게 달려 들어
위턱으로 그들을 누르고 독침으로 사정없이 찔러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위를 차지하기 위한 잔인한 살생은 이어지고,
간혹 어린 왕녀들을 보호하려는 일벌들에겐
보통의 날개짓과는 사뭇 다른 날개짓으로 제압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만듭니다.

모든 자매들을 자신의 독침으로 손수 죽이고 나면
유일한 암벌은 비로소 여왕으로 등극을 합니다.

아주 드물게 그런 대학살을 모면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는 암벌이 생기는데
그럴 땐 암벌들끼리 처절한 한판 결투가 벌어지게 된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한 일은
두 마리의 암벌이 여왕자리를 놓고 결투를 벌일 땐
결코 독침을 무기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독침을 사용했다가
두 마리의 여왕 후보가 동시에 죽음으로써
왕국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는 지혜겠지요...

결국 최후까지 생존한 오직 한 마리의 암벌은
둥지에서 나와 수펄들과 아름다운 비행으로 정받이를 하고,
왕국의 상공을 한두 바퀴 돈 다음 돌아와
드디어 여왕벌의 지상과제인 알 낳는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꿀벌들의 이러한 분봉의식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몹시 부끄러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물이라 여기는 한낱 곤충도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나는 과연 정직하고 슬기로운 공생(共生)의 노하우를
얼만큼이나 터득하고 있는가 참으로 반추하기 민망하였습니다.

갑자기 스치듯 떠오른 묵은 기억 한 쪽 때문에,
자신이 가진 독침으로 일말의 가책도 없이
아무나 찔러대지나 않았는지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는
한여름의 열대야입니다...


그대...

그대의 깊디 깊은 의식 속에
저는 망각과 기억, 어느 편에 서 있는지요...

그것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아요...

그러나 결코...
그대를 거기 두고, 레테의 강을 건너고 싶지 않습니다.

꽃과 나무가 마른 땅에도 굳게 뿌리를 내리듯
저도 식물처럼...

그대의 마음 속에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의 뿌리를 내려야겠습니다...






                ----- Let me s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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