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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요약 된 슬프고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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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사천리 댓글 1건 조회 790회 작성일 03-10-29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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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거리에 비렁뱅이 가객(歌客) 하나가 구부러진 등에 거문고를 엇비슷이
메고 싸락눈내리는 진창에 맨발을 축축 담그며 내려왔다.
그의 노랫가락은 나직하고 힘차서 이 싸늘한 거리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반지문을 열었고, 다리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땅 속에 소리를 심고 있는 가객에게 주목하였다.
“사람을 못견디게 하는 소리구만. 저런 소리는 이 저자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 들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허리춤을 끄르고 돈을 던졌다.
“하나 더 해라.” “얼굴을 들고 해라. 안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역정과 증오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흉하였으며, 노래를 부를수록 더욱 흉하게
일그러져 가락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그 추한 얼굴 때문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처음 소리는 우리가 속아 들은 것이다.
이렇게 기분 나쁜 노래는 들은 바 없다.”
“웬 사귀(死鬼) 같은 놈이 나타나서 일진을 잡쳤다.”
누군가가 돌멩이를 집어던졌고, 사람들은 이 비렁뱅이를 때려 죽일 것
같았다. 다리 밑에서 피로 얼룩진 추한 얼굴을 씻어내던 가객이 다리 밑에
사는 문둥이 깨구쇠에게 물었다.
“너도 날 미워하니?” 가객의 이름은 수추(壽醜)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지만, 여기선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깨꾸쇠는 강건너 인적 없는 사원 빈터를 가르쳐 주었고, 그는
그리로 건너갔다.

그가 사원 빈터에서 거문고 가락에 노래를 얹으면 숲에서 나오는 온갖
소리마저 잠잠해졌다. 새들은 일시에 울음을 그쳤고, 맹수들은 포효를
잊었으며, 숲 그늘에는 노래를 듣기 위해 조심조심 다가오는 짐승들의
발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날씨가 맑으면 수추는 물가에 앉아 제
용모를 비춰보며 울었다. 그가 처음 완전한 가락에 이르렀을 때도 물가
에서였다.
그의 손끝에서 완전한 가락이 울려 퍼지는 순간 그는 물속에 비친
흉물스런 얼굴을 보았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노래에 집착했다.
어느 날 훤한 대낮에 그의 노래가 거문고의 가락에 얹히려는 참에 줄이
탁 끊어졌다.
끊긴 줄이 울어대는 무참한 소리가 그의 노래를 산산이 으스러 뜨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거문고를 계단 위에 내동이치고 말았다.
수추는 그날 밤 진실로 오랜만에 평화롭게 잤다.
그는 노래로부터 놓여난 것이다.
수추는 이 죽음과 같은 휴식 안에서 비로소 노래만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미워했던 제 모습이 이제 변화된 것을 알았다.
물을 마시려던 그는 물속에서 환희의 얼굴을 만났다.
삶의 경이로 가득 찬 그의 뺨에는 땀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는 남이 자기를 보고 까닭없이 미워함을 두려워하기 전에, 자신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도록 다시
살아야 함을 느꼈다.

그는 부서진 악기조각을 불사르고, 다시 저잣거리로 돌아갔다.
그가 동냥 그릇을 내밀자 사람들은 음식을 가득가득 담아 주었고, 수추는
뜨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다.
다리밑 깨꾸쇠의 움막에 들어온 이후로, 수추는 달라졌다.
문둥이 깨꾸쇠가 진무른 종기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노라면
그는 엎드려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곤 했다.
깨꾸쇠는 그가 종기를 핥는 동안 편안히 잠들었으며, 추위에 떨면서
신음하면 수추가 뒤에서 감싸고 체온으로 몸을 녹여주었다.
수추는 저자에 나가 일을 했다.
나룻가에서 짐을 부리거나 수레를 끌어주고 먹을 것을 얻어왔다.
그는 저녁마다 아픈 사람을 찾아 다녔고, 잔치가 있거나 슬픈 일이 일어난
집에 찾아가 주인에게 공손히 청하여 조심스레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의 노래는 아늑하고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정과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돋아나게 했다.
수추는 추했던 제 얼굴을 이제 모두 잊었다.
그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닮은 사랑스럽고, 겸손한 사람들로
보였다. 나아가 수추 자신이 그 사람들을 닮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강변 나루터에 가면 언제나 그의 콧노래라든가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는 짐을 부리면서 내내 자기 자신에게 들려나 주듯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그 곡조를 배워 모두 따라서 부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저자의 거리잔치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었다.
사람들은 수추를 위해 오동나무를 내어주고, 그는 거문고를 정성껏
만들었다.
수추의 노래와 거문고 소리를 들으려고 먼 지방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와서 저자는 번잡한 거리가 되어 버렸다.
아픈 사람들이나 슬픔에 겨운 사람들이 수추의 고통을 씻어주는 노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며칠을 걸어서 저자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의 노래는 마음을 찌르고 힘을 솟구치게 해서 살아 있는 환희를
갖게 했다. 노래하는 그의 얼굴은 무언지 모를 믿음을 전파시켜 주었다.
그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몸짓에서 몸짓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이 목청을 합하여 저잣거리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고, 누군가 문둥이
깨꾸쇠의 더러운 뺨을 비비고 끌어안으며 외쳤다. “복 많이 받아라.”

노래가 계속되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자, 이 소문을 들은
장자(長者)가 수추를 잡아들였다.
그의 눈에는 수추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당장에 놓아주리라.”
“저는 살아 있는 한 노래를 불러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곳을 떠나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은
용서해 주겠다.”
“저는 제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장자는 그의 악기를 세쪽으로 쪼개어 밥상을 만들고, 수추를 감옥에 가두
었다.
수추는 감옥에서도 노래를 계속 불렀고 그 노래가 감옥을 데워주었으며,
저자바닥으로 퍼져나갔다. 혀를 잘라 감나무 가지에 매달아 두었으나,
감히 까마귀가 그 혀를 먹질 못했고, 수추는 목구멍으로 노래를 불렀다.
장자는 마침내 그의 목을 쳐서 장대에 꽂아 저자에 내걸었는데, 그의 얼굴
이 하도 행복한 모습이어서,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수추가 남긴 노래
들을 은밀히 불렀다.
장자는 그의 흔적을 아예 없애려고 했다. 다리는 허물어지고, 오동나무는
뿌리채 뽑혔고, 깨꾸쇠는 강건너로 쫓겨났다.
장터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면 수추의 노래는 여전히 불려지고 있으니 그
가 죽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깨꾸쇠는 아직도 수추의 팔딱이는 혓바닥을 품에 지니고, 새로운
새벽이 밝을 때마다 강변으로 마중을 나갔다.

이 이야기는 황석영이 쓴 「가객」이라는 소설을 요약한 것이다.
슬프고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이다. 한 인간에게 있어 구원이란,
이렇게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자기 만족적인 득음(得音)은 오히려 그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지만,
타인에게 열려진 득음은 자신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만파식적
(萬波息笛)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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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님의 댓글

심재훈 작성일

명진이형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