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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 서비스 류 NO.142 *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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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 영탄 댓글 0건 조회 691회 작성일 05-03-2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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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年 3月 22日 火曜日

아침
左 하퇴 ㅡ 무릎7CM아래절단 ㅡ 6년 次 영탄퀵 세상사는 이야기입니다.
밤8:00. 서울역거리는 조용하다. 수 많은 차들과 복잡하게 오가던 사람들은 어느덧 사라지고 영탄퀵 홀로 오다를 선별하다 * 본사상황실 상황종료 * 하여 김포공항으로 날라간다. 김포공항에서 영탄퀵 상황종료하고 다시 머나먼 하남으로 날라가다 * 강서구 염창동에서 몸이 허한관계로 다이어트 순간 중단하고 감자탕으로 늦은 저녁을 대신한다. 감자탕의 담백함이 혀를 약올리니 그 친구 쐐주가 그리워진다.

평일 금주하는 영탄퀵인데 * 그냥 반주로 쐐주 석잔마신다. 밤9:30분에 즐기는 감자탕 한그릇에 소주 석잔은 하루의 즐거움을 사랑해준다. 옆 자리에는 담배연기를 피해 금연석에 행복하게 존재하는 30대 초반부부와 소중한 아가가 엄마의품안에 숨어있다. 이러튼 저러튼 밥먹는 식당에서 담배피우는 X새끼들 전부 X여야한다. 저어린아가는 무슨 죄로 담배연기를 마셔야한단말인가? 아무리 금연석이라고 하나 흡연석과 불과 5M정도 떨어져 있으니 담배연기가 어디로 가겠는가? 담배피우는 것은 좋다. 본인의 취미를 누가 말하겠는가? 그러나 예의가 있다. 제발 밥 먹는 식당에서는 금연하라!

식사를 즐기는 부부의모습이 아름다워 * 아가가 사랑스러워서 대화를 시작한다.
동갑내기 부부는 얼마전에 딸을 순산했고 아빠는 공무원이라고 한다. 동갑이기에 싸우기도 많이했고 * 사랑도 많이하여 오랜 연예기간 후 결혼했다 한다. 젊은 아빠는 키도 크고 얼굴도 미남이다, 물론 직업도 안정적이다. 아내역시 단아한 미인이었다. 저 아름다운 아가는 아빠의 씨와 엄마의 피와 뼈와 살을 물려받아 아름다운 청춘으로 성장할 것이다.

부디 ! 훌륭한 아빠 * 엄마로 존재하여 아가의 성장을 훌륭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이 ! 우주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아름다운 부부와 아름다운 아가를 오늘도 경험하며 神께 감사드린다. 영탄퀵은 젊은 부부에게 진심어린 말씀을 드린다. 부부사이에 가장 중요한것은 < 존경심 > 입니다. 서로에게 존경심을 잃지 않도록 言行하고 서로 존경하는 긴 삶을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전화번호 교환하고 후에 부부동반으로 만남을 약속한다.

쐐주 석잔을 경계하기 위하여 커피한잔 마시며 한시간 동안 공원에 누워서 노숙자가된다. 역시 영탄퀵은 체질적으로 노숙자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리랑치기 조심해아하는데 * 밤12:00. 맑은 정신이 되어 다시 하남으로 날라간다. 강서구 염창동에서 하남시청까지 45KM의 거리이다. 88도로는 바이크 통행금지 * 하지만 영탄퀵이 法 지키고 살아보질 못해서 시원하게 뚫린 88도로를 날라간다. 미사리 진입전까지 브레이크 한번 안잡고 최고속도로 날라간다. 속도감은 영탄퀵에게 집중력을 경험시켜주며 死 線 (사선)과 친구하고 싶은 정신을 유혹하며 삶과죽음의 한계선에서 존재하게한다.

코너링도中 영탄퀵의 시야를 빠르게 지나가는 防 護 (방호) 라인과 저 강물은 영화 <그랑블루>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주인공이 늦은 밤 갑자기 일어나 * 사랑하는 임신중인여인과 곧 탄생할 아가를 뒤로하고 저 바다속으로 * 자신의세계로 영원히 돌아간 이유를 공감한다. 코너링을 벗어나 직선을 날라가면서 순간 영탄퀵은 최고속도를 내며 저 강물속으로 날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영탄퀵 강인함속에서 존경받는 긴 삶을 산다.

술마신 다음 날 항상 감자탕으로 해장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 지금도 감자탕을 좋아한다며 얼마전에 통화를 했다. 이번주 토요일에 선약이 없다면 * 서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쐐주한잔에 감자탕 희망한다. 영탄퀵은 별로 공감하지 않지만 좋은 말씀이라 筆한다.


師父 曰

가능하다면 * 모든 사람과 더블어 평화롭게 지내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아라.

ㅡ 로마서 12장 17~21절 中에서 ㅡ


< 서양미술 400년 展 > ㅡ 푸생에서 마티스까지 ㅡ

\" 선과 색\" 이란 주제는 17세기 이후 프랑스 조형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

인가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중세의 예술가는 단순한 장인으로 여

겨졌으나 17세기부터는 창작자로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 1670년경 두 가지

예술적 접근 방식이 대립되기 시작했다. 니콜라 푸생을 선두로 하여 선의 우위를 내세

우는 접근과 페테르 파울 루벤스를 뒤따라 색을 강조한 접근이 그것이다. 외교관이자

화가였던 로제 드 필은 당시 선과 색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파리국립아카데

미를 크게 뒤흔들었고 * 이 논쟁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어지게 된다. 19세기 장 도미니

크 앵그르와 외젠 들라크루아 사이에 있었던 대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랭스 미술관은 꾸준한 작풐 구입 * 후원자들의 작품 기증 * 프랑스 혁명 이후 국보급

작품의 관리 및 소장을 위탁받아 이번 전시의 주제인 서양 미술 400년간 이어져온 선

과 색의 대립을 일목요연하게 살힐 수 있는 풍부한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머리글의

지면을 빌어서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프랑스 랭스 미술관의 작품 수집의 역사

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 한다.



랭스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이미 다수의 작품을 소장 하고

있었다. 1677년 화가 장 엘라르와 조각가 이삭 들라크루아가 랭스에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하였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래스 시는 1748년 무상 교육을 하는 드로잉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752년에는 학교 소장의 회화와 소묘 작품들을 시에 지증했

는데 * 디 가운데 소묘 수업의 표본으로 사용하기 위해 17세기에 독일에서 구입한 크라

나흐의 초상화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수천 점의 소묘와 판화 * 석고 조각 및

회화 수집품이 모여서 랭스 미술관의 출발점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도서관의 부장관으로 임명된 니콜라 베르주아 신부는 도주나 구

류 상태에 있는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이 파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느 임무를 맡았다. 베

르주아 신부는 랭스 출신의 화가 미셱 니콜라 페르스발의 도움을 받아 공화력 2년의 메

시도르 * 즉 1794년 6월 20일에서 7월 19일까지의 \" 수확의 달 \" 동안에 [ 국가가 위탁

한 작품과 함께 랭수 미술관 소장 작품의 유입과 유출 목록 ]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260여 점의 작품이 수록된 목록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랭스 미술관 소장 작품의 수집

역사를 흝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795년 공화국은 미술 작품 보관을 위하여 * 마침내 시청 건물 2층에 미술관을 마련하

여 * 1800년 4월 5일부터는 1 주일에 한 번 일반에 공개하였다. 그러나 1804년 일어난

도난 사건으로 인하여 미술관은 소장 작품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군다나 제

1제정 시대에 이르러 랭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미술 작품을 국가가 회수하면서 작

품이 크게 분산되었고 * 1806년부터 소장품은 미미한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830년 이후 랭스 시 관할의 새로운 미술관 부지를 확보하게 되면서 * 당시 랭스 시장

이었던 오귀스탱드 생 마르소는 문화적 마인드를 가지고 새 미술관 건립을 야심차게

추진했다. 1835년 미술관장으로 임명된 루이 파리는 미술관을 시청 안으로 옮겼다. 국

가의 작품 위탁과 기증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19세기 동안 랭스 미술관의 소장품은 풍

부해졌고 * 제2공화국 이후에는 국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작품 수집을 위탁받았다.



1872년에는 마른 지역의 의원이자 장관인 쥘 시몽의 중재로 미술 위원회가 작품 12 점

을 미술관에 위탁하기도 했다. 소장자들의 잇다른 기증으로 미술관의 소장품수가 눈

에 띄게 증가했다. 1897년 고위 공관 쥘 와니에 다비드는 코로릐 작품 10 점을 랭스 미

술관에 기증했다. 1907년 거의 600 점에 달하는 작품을 기증한 앙리 바니에 공사관은

시청옆에 위치한 생 드니 수도원 건물레 새 미술관 건립을 계획했고 * 이후 레이몽 프

엥카레 의장이 1913년에 미술관을 개관했다. 또한 바니에는 랭스에 \" 작은 루브르 미술

관 \" 을 세우려는 생각으로 가능한 한 최적의 조건에서 소장품을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독자적인 미술관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 1 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 * 랭스 시장이었던 장 바티스트 랑글에 박사는 폭격으

로 파손된 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1921 - 23년 사이 국외로 유출되었던 작품의 회수

에 전념했고 * 1939년 국제적인 긴장 정세로 미술관이 다시 문을 닫게 되자 소장품을

1945년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지어 이 기간에도 소장품의 수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루브르 미술관 회화부의 관장 폴 자모는 개인소장품을 루브르 미

술관과 랭스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는 1927년 랭스 미술관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랭스

에 각별한 애정을 지녔었다. 그가 기증한 150여 점의 회화 * 소묘 * 수채화 작품들은

1949년 10월 1일 미술관장인 올가 포포비치의 주관으로 전시되었다.



이후 베르나르 * 보나르 * 샤세리오 * 코로 * 고갱 * 마티스 * 푸생 등 여러 대가들의

작품이 랭스 미술관에 들어오게 된다. 이들의 작품은 이번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회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선과 색에 관련하여 한국에 소개되는 작품 중에서 일

부는 루브르 미술관 * 오르세 미술관 등 다수의 프랑스 국립미술관에서 온 것임을 밝혀

둔다. 이 전시회를 위해 도움을 주신 여러 미술관 관계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영탄퀵에게 소중한 미술정보를 선물한 열정적인 친구에게 사랑을 전한다.


ㅡ 다비드 리오 * 랭스 미술관 관장 曰 ㅡ

전시기간 : 2005년 4월 3일 일요일까지

전시장소 : 서초구 서초동 < 예술의 전당 > 한가람미술관 제 4 * 6 전시실

주의 ㅡ 매월 마지막 월요일 휴관 ! 즉 * 3월 28일 휴관 ! 

개관시간 : 10:00 ㅡ 20:00 ( 매표마감 1 시간 전 )

관람료 : \\10,000  BUT 데코는 \\3,000  ^8^

전시문의 : 02-2113-3477

www. arthistory400.com


친정에 存在하는 편잡장님 출근 늦게해서 죄송합니다.용용용

오늘은 오랫만에 영탄퀵 막탕치고 처가집으로 날라갑니다요 !

이따 봐~~용 ^ 8 ^

사랑합니다.

데코님들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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