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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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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지연 댓글 0건 조회 897회 작성일 08-01-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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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구두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8-01-08 14:01 | 최종수정 2008-01-08 14:43 
 


 
하나밖에 없는 구두 - 남궁정부

오른팔 없는 구두장이, 남궁정부

그는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오직 한 켤레밖에 없는 구두를 만든다. 이 쓸쓸한 행성에서 그는 지구보다 더 쓸쓸한 사람들을 위해 가죽을 자르고, 무두질을 하고 석고틀을 뜬다. 다리 없고, 기형적인 발을 가진 신발 주인들이 찾아오면 주름진 얼굴에 미소 하나. 그리고 어엿하게 두 발로 서서 햇살 가득한 문으로 걸어가는 신발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면 남궁정부(69)씨는 왼손으로 새 신발 주인 손을 잡고 행운을 기원한다. 그는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만든다. 오른손은 없다. 어깨 아래로 펄럭이는 잠바 소매 속에는 텅빈 공(空). 1995년 어느 날 이후 그는 오른팔이 없다. 아니, “모든 게 다 있고, 없는 것은 오른팔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구두 장인 남궁정부씨. 생의 의지를 되살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만든다. 기형 발을 가진, 혹은 사고로 발을 잃어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구두를 맞춘다. 그리고 목발과 휠체어를 버리고 걸어서 구두가게를 나간다. /박종인 기자

남궁정부 선생을 만난 곳은 신들의 땅 네팔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였다. 2006년 4월 대한민국 수많은 절단장애인 가운데 7명이 히말라야로 갔다. 서울 이태원에서 전복 요리집을 하는 요리사 채성태, 그리고 그와 함께 트럭을 개조한 이동식 주방 ‘사랑의 밥차’를 타고 다니며 무료 급식 봉사를 하는 가수, 모델들과 함께 이 절단장애인들은 바다 위로 4700m 솟아 있는 칸진리라는 산에 오르려고 나선 길이었다. 남궁 선생은 그 7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히말라야라고 하면 사람들은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8000m가 넘는 고산을 떠올린다. 그래서 4700m라고 하면 “고까이꺼”하며 웃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백두산보다 근 2000m가 높은 산이다. 함께 간 사람들은 허벅지 아래 두 다리가 없는, 그리고 한쪽 무릎 아래가 없는, 그리고 한쪽 발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니, 도대체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높은 산을 오르겠다고 나설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오죽 쓸쓸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고산(高山)과 동무 하겠다고 나섰을까.

 
하나밖에 없는 구두 - 남궁정부
대한민국에서 목발 짚고, 온 몸 출렁이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걸어 다니는 사람치고 손가락질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멀쩡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저 외형이 그러하다는 이유만으로 홀대와 냉대를 받으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사건 사고로 뒤늦게 장애자가 된 ‘절단’ 장애인들이라면.

그게 그들이 히말라야로 간 이유였다. 자기도 남만큼 산에 올라 산과 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런 실성한 짓을 감행한 것이었다. 4박5일 동안 지켜본 그들의 산행은 필설로 형언키 어려울만치 감동적이었다. 사지 멀쩡한 내가 고산증과 찢어질 듯한 피로에 허덕일 때에도 내 앞뒤 양 옆에서 그들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걷고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정상에서 함께 펑펑 울 수 있었다. 거기에 남궁정부가 있었다. 한국 나이로 2007년 고희(古稀)를 맞은 노인이 칸진리봉에서 울어버린 것이다.

남궁 선생은 구두쟁이였다. 수제화가 인기를 끌던 70, 80년대에 웃돈을 받아가며 여기 저기 스카우트되던 구두 장인이었다. 세월은 냉정한 것이어서, 1990년대 들어 수제화의 시대가 가버렸고, 남궁 선생은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곤궁해졌다. 1995년 11월 그 날도 생계를 걱정하며 옛 동료들과 세상을 취중작파하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한 인생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몰리는 서울 지하철 신도림역. 플랫폼 가득 들어찬 인파에 밀려 쇠락한 구두쟁이는 선로로 떨어졌고, 그 위로 열차가 덮쳤다. 굉음과 요란한 불빛을 던지며 달려오는 전철을 보며 그는 기절해 버렸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고, 요행히 죽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며 몸을 찬찬히 살피니, 오른 손이 그대로 있었다고 했다. 조금씩 눈을 올려보는데, 팔이 너덜너덜하게 찢겨서 어깨에 붙어 있더라고 했다. 평생 구두쟁이로 살았던 사내가 인생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입원 사흘째 되던 아침, “살아야겠다”는 말을 머릿속에서 수백번 외치고서 그는 일어났다. 만류하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면도기를 사서 왼손으로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병원을 쏘다녔다. 생의 의지, 좌절하지 않는다.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수술해서 나머지 팔을 다 잘라내자”는 의사 말에 곧이곧대로 몇 센티미터 남은 팔까지 다 잘라내고 퇴원했다. 열흘 만이었다. 삶의 계획은 전혀 없었다.

의수를 만들러 간 의료보조기상 사장이 선언했다. “남은 팔이 너무 짧아서, 물건을 잡을 수 있는 기능성 의수는 어렵겠습니다.” 기가 막혔다. 수술을 왜 또 했나 했지만, 그 다음 말이 그를 사로잡았다. “성한 팔이 있으면 그 팔만 쓰려고 하니까 더 어려워요.” 옳거니, 나는 왼팔이 있지 않은가. 오른팔이 없는 게 아니라 오른팔만 없는 거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구두쟁이였다는 말이 나왔고, 보조기상 사장이 툭 던졌다. “장애인 신발 한번 만들어 보지요?” 인생 2장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1장이 끝난 게 55세였고, 2장은 금방 시작됐다. 중간 휴식도 없는 숨 가쁜 무대였다.

마음을 다시 잡고 처음 시작한 것이 젓가락질과 글씨 연습이었다. 밥상은 온통 흘린 반찬과 밥풀로 도배가 됐지만, 구두쟁이는 왼손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쉰여섯 먹은 사내가 밥상을 발로 차며 펑펑 울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커다랗게 네모칸이 그려진 글씨 연습장을 사서 기역 니은 디귿을 쓰기 시작했고, 그게 익숙해지면서 가죽 자르기도 다시 시작했다. 처남 집 차고에 세창정형제화연구소(isechang.com)라고 간판을 걸어놓고 손님을 기다렸지만, 홍보도 없었고, 설사 홍보가 됐더라도 찾아오지 않았을, 손님은 없었다. 하나 있던 직원이 그리도 말렸지만, 날카로운 재단용 칼을 제 손으로 들겠다고 가죽을 자르다가 허벅지를 쑤셔 가게를 피바다로 만든 적도 있었다. “참을 忍자 세 번을 쓰면 왜 살인도 면할 수 있는지 알았다. 그만큼 그 고통을 참는 게 어려웠다.” 이제는 쌈도 싸먹고, 가죽 재단용 칼도 무소불위로 휘두를 줄 알게 된 외팔이 선생이 웃는다.

단골 가죽상도 팔 없는 구두쟁이에게 외상은 주지 않았다. 돈이 꾸역꾸역 들어갔다. 아내는 식당일을 하며 그 돈을 메웠다. 그러다 가게를 연 지 6개월이 지난 1996년 11월. 한쪽 다리가 8㎝ 짧은 40대 손님이 찾아왔다. 뒷굽을 높여준 구두를 신고 간 사내가 다시 찾아왔다. “길이는 좋은데, 발이 자꾸 앞으로 미끄러져요.”

 
하나밖에 없는 구두 - 남궁정부
팔 없는 장인이 만든 구두를 신어줘서 고맙고, 자꾸 미끄러지는 구두를 신어준 게 또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후 그의 몸에 꼭 맞는 구두를 맞추느라 세월이 갔지만, 남궁 선생은 “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날 때부터 소아마비였던 소녀, 그래서 결혼식 때 꼭 제대로 걸어서 웨딩마치를 하고 싶은 게 소원이었던 여자에게 구두를 맞춰주고, 기형적으로 발이 커서 태어나서 단 한번도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는 사내에게 신발을 신겨주던, 그래서 그가 구두닦이에게 당당하게 “구두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게 해준 그런 일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가게가 문을 닫을 정도로 곤궁해졌을 때, 단골 손님들이 찾아와 십시일반으로 모은 3000만원짜리 통장을 내밀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당신 없으면 우리가 걷지를 못 하니, 당신은 꼭 돈을 벌어라”라고 막무가내로 통장을 내밀더라고 했다.

그 모든 신발이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오직 한 켤레밖에 없는 신발들이었다. 손바닥에 한 켤레가 오롯이 들어가는 작은 신발도 있었고, 겉보기에는 신발 형태로 보이지 않는 자루 같은 신발도 있었다. 모두 우주에 하나뿐인 왼팔로 만든 신발, 자그마치 5만켤레다.

그러다 히말라야로 갔다. 그가 말했다. “히말라야, 아무나 가나. 다 가고 싶어하는데 못 가는 곳이잖아. 그런데 기업이 도와줘서 가게 됐더라고. 그럼 가야지. 죽기 전에 언제 가보겠어.”

발가락 하나 없어도 걷기 어렵다. 팔 하나가 없으면 균형을 잡는데 지극히 어렵다. 하물며 칠십 노인이 구토와 어지럼증이 난무하는 고산을 걷겠다는데. 그런데 그가 걸어 올랐다.

젊은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셀 수 없이 많은 순간을 좌절과 포기와 오기 사이를 오가는 사이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구름 뒤 먼 산을 향해 걸어갔다. 걷다가 걷다가 더 이상 더 오를 곳이 없을 때 그는 바위에 앉아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슬쩍 웃었다. 선글라스 뒤편에 있던 그의 눈동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발도 없고 다리도 없는 젊은 20대, 30대 청년들이 온통 눈물투성이가 된 채 칸진리에 올라와 그에게 다가갔을 때, 그 선글래스 아래에 고요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연아, 상민아, 병휘야, 우리 모두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 나는 산을 내려와 그날 저녁 선생 앞에서 대취하여 선생 어깨에 기대어 크게 울었다. 오른팔도 있는 나는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가.

[글·사진·영상=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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