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희망원정대 조선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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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석은 댓글 0건 조회 902회 작성일 08-04-22 11:56본문
'희망원정대'의 히말라야 등정기
아름다운 실패의 기록
글·사진·영상=카트만두 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입력 : 2008.04.19 15:51 / 수정 : 2008.04.19 20:16
가만히 서 있는데도 숨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모자라는 공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해발 4700m, 네팔 히말라야 나야칸가봉(5846m) 하이캠프. 밤새 몰아친 눈보라에 텐트들이 절반은 묻혀 있다. 천지사방에 눈보라가 몰아쳤고,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들 얼굴은 어둡다. 해발 1350m 사베르베시에서 시작했던 8박9일의 산행. 예기치 않은 끝이 예감됐다.
온통 잿빛인 하늘 뒤로 마지막 목적지 나야칸가봉이 숨어 있는데, 등반대장 고미영(42·코오롱스포츠)씨가 선언했다. “?10년 만에 처음 보는 악천후입니다. 전문산악인도 가기 어려운 날씨입니다. 하산(下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까지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왼쪽 팔이 없는 이수미(31)씨, 왼쪽 발이 없는 이지연(23)씨, 그리고 오른쪽 다리가 없는 김진희(41)씨 그리고 그들을 도와 8박9일 동안 히말라야를 걸어온 모든 대원들은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덕담을 던졌다. “고생 많았어요. 여기까지 온 게 어딘데….” 그래도 분위기가 어색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웃자, 웃자!” 동행했던 연예인들이 콘서트를 시작했다. 이영범, 이범학, 방대식, 홍종명, 유승혁, 오은주…. 희망원정대를 위해 만든 곡(曲) ‘너라면 돼’가 히말라야 계곡에 울려퍼졌다. “너라면 돼, 너라면 돼. 너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냐~” 웃자고 했던 원정단장인 류홍규 준장(공군사관학교 부교장)은 하산 도중에 끝내 울었다. “그냥, 사람들이 장하고, 가슴 속에 뭔가 북받쳐서….”
이러저러한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절단장애인 7명이 히말라야에 도전했다. 7세부터 이들을 돕기 위해 따라온 경찰관, 연예인을 비롯한 대원 34명으로 이뤄진 ‘희망원정대’다. 연예인 봉사단체인 사랑의 밥차(대표 정준호)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고 코오롱스포츠가 협찬을, STX가 후원을 해 이뤄진 이번 원정대는 지난달 27일 랑탕히말 지역 나야칸가봉을 목표로 인천을 떠났지만 악천후로 인해 하이캠프에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실패했으되,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이 아니라고. 미완의 도전기, 14박15일 동안 이들이 겪은 행복과 좌절을 기록했다.
#1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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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첫날인 3월 29일 아침. 해발 1350m 사베르베시에서 원정대가 산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르고 있는 대원들에게 고미영 대장이 말했다. “사점(死點)이라는 게 있습니다. 산을 걷다 보면 숨이 막히고, 도저히 더 걸을 수 없는 시점이지요. 그때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점만 넘기면 그 다음에는 무념무상입니다. 저절로 걸어집니다.” 일행은 ‘죽음의 포인트’를 생각하며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티베트 불교의 만장이 휘날리는데, 아직은 사점이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정상민(34)씨는 일찌감치 그 사점을 넘긴 사내였다. 세 살 때였다. “엄마한테 용돈을 받아서 가게로 가다가 트럭이 덮쳤어요. 자빠져서 보니까, 내 다리가 트럭 바퀴 축에 말려들어가 뱅뱅 돌고 있는 거예요. 고함 소리에 엄마가 수건 들고 와서 내 온몸을 싸안고 병원으로 갔어요. 그 다음엔 기억이 없어요.” 이수미(31)씨도 마찬가지. “잡지사 기자였는데, 어느날 버스에서 내리다가 버스가 개문 발차를 한 겁니다. 탁 하고 넘어졌는데, 보니까 내 몸뚱아리는 버스 바깥에 있고, 내 왼쪽 팔이 뒷바퀴에 껴서 저만치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는데!”
두 사람 다 사점을 넘겼지만 이후 그들의 삶은 “웃고 있지만 정말 힘들고”(정상민) “전염병 환자 대하듯 아무도 옆에 오기 꺼려하는”(이수미) 허망한 인생으로 변해버렸다. 상민씨가 말했다. “그래서 히말라야에 온 거예요. 올 초에 첫 아들 웅천이가 태어났는데, 애가 크면 ‘아빠가 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도 가기 어려운 히말라야에 다녀왔다’고 말해줄 겁니다. 아빠가 장애인이면 애도 상실감이 크거든요.” 상민씨가 가족사진을 목에 걸었다. 서른 넷 먹은 사내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산으로 들어갔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계곡 랑탕히말에는 봄꽃이 피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살아남기 위해 땅에 납작 엎드려 피어나나 민들레, 한국 진달래보다 잎이 두꺼운 히말라야 진달래 티카, 그리고 그 사이에 소, 말들이 갈긴 똥이 군데군데 누워 있었다.
희망원정대 최연소 대원인 손제인(7). 태어날 때부터 두 발과 양손 손가락이 없는 제인이는 소똥이 보이면 “소똥 조심”, 바위지대가 나타나면 “바위 조심”을 외치며 어른들을 즐겁게 했다. 원정대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인이를 걱정했다. 해발 3000m를 넘으면 귀신처럼 나타나는 고소증, 그리고 행여 있을 지 모를 사고에 제인이는 언제나 제1의 관리대상이다. 자기 발로 걷고, 말을 타고, 그리고 삼촌처럼 보살펴준 포터 유르미(23)씨의 도움으로 제인이는 해발 4200m 베이스캠프까지 올랐다. “맥박수가 조금 높아, 더 이상은 어렵다”는 팀닥터 신호식씨의 판단으로 하산 결정이 떨어지자, 제인이는 “왜 나만 내려가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해발 3700m 산장에서 재회한 제인이는 “삼촌들 어서 와. 소똥 조심했지?”하며 우리를 반겼다.
#2 히말라야를 닮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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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길은 험난했다. 완만했던 숲길은 사흘 만에 바윗길로 변했고 해발 2000m 지점에서 원정대는 목이 아플 정도로 경사가 진 고갯길을 만났다. 모두 겁에 질렸다. 특전사 출신인 경찰관 김철수(42)씨도 “와, 이걸 어떻게…”하고 내뱉었다. 그는 왼쪽 다리가 없는 청년 정창영(27·사회복지사)씨를 부축하는 멘토다. 300m 정도 되는 그 고갯길, 한 시간 걸렸다. 그 사이에 의족과 맞닿아 있던 창영씨 다리는 피투성이가 됐다. 고개 꼭대기 찻집에 앉으니 설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웅장하고, 위대한 해발 2375m 찻집에서 장애인들의 상처 부위는 그들의 의지와 경치의 위대함에 비례해 망가지고 있었다. 그런 창영씨가 말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 아이들에게 장애인을 설명하면서도 내 상처를 보여주지 못했어요. 돌아가면, 글쎄요. 좀 다를 거 같은데요?” 그렇게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히말라야에 빠져들었고, 어느덧 백두산보다 높은 해발 3008m 고다타벨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조금 더 큰 자신감과 조금 더 힘든 여정을 거쳐 해발 3400m 랑탕 마을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히말라야 설국(雪國) 풍경이 시작됐다. 그리고 다음날, 정말 어렵게 고도를 300m 높여 칸진곰파 마을에 닿았다. 원정대 대원들과 내기를 벌인 포터 얄부(28)씨가 마을 앞에 있는 4200m짜리 칸진리 소봉을 40분 30초 만에 정복하고 내려왔다. 일반인은 6시간이 걸리는 코스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그를 기다리던 우리들은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상금 100달러를 선물했다. 그날 밤부터 폭설이 쏟아졌다. 실무를 맡았던 트레킹 여행사 유재수 상무는 “이곳은 밤새 눈이 오고 낮에는 햇볕에 녹는 곳”이라고 했다. 폭설은 그런데 일주일 동안 멎지 않았다.
#3 은하수가 보이지 않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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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적응을 마친 이틀 뒤 고미영 대장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제부터 귀찮고 예민해지고 싸우게 됩니다. 서로를 먼저 생각해주십시오.” 공기가 희박해지고 몸이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예민해져갔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도움을 받는 사람도. 식사 투정이 늘었고, 일정을 두고 대립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현지 주민들이 어렵게 산악 소인 야크 고기를 내놨지만, 대부분 식사를 물렸다. “미리 포기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결의를 다진 뒤, 한 순간 솟아오른 태양빛을 받으며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로 출발했다. 천지사방이 흰눈을 뒤집어쓰고 반짝였다. 티베트 불교 장식탑인 마니추르를 지나 설산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다.
“이 고개만 넘으면 넓은 능선입니다. 조금만 힘냅시다.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시고요.” 고미영 대장이 지시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 설산 사면이 하늘까지 솟구쳐 있다. “한 40도?” 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측량했지만, 40도 경사가 어디 아이 이름인가. 미리 셰르파들이 눈길을 만들어놓았지만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지연씨가 말했다. “그래도 가야죠.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경찰관 멘토 조서희(41)씨 손을 붙잡고 포터의 도움을 받으며 또박또박 하늘로 올라갔다. 의족과 맞닿은 지연씨 발목은 이미 곪아 있다. 지연씨는 능선을 앞에 두고 눈밭에 쓰러졌다. “…하늘 바라봤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제인이의 포터 유르미씨. 난감해하는 사람들 눈치를 보던 그가 제인이를 들쳐업더니 비탈을 뛰어오른다. 불길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내는 소방관처럼, 그는 우리들 눈에 영웅으로 보였다. 그를 따라 오른 능선에서, 일찌감치 미리 출발했던 김진희씨가 쓰러져 있었다. 그날 아침 지급 받은 식량은 삶은 달걀 2개와 육포 몇 조각과 물 한 통. 그렇게 쓰러지고, 걷고, 하늘 한번 구경하며 우리들은 결국 해가 떨어지기 전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고, 연예인들은 4200m 설산에서 유쾌한 콘서트를 열었다. 뒤늦게 도착한 김진희씨를 가수 이범학(42)씨가 부둥켜안았다. 캠프 저 아래 강이 흘렀다. 흰 구름이 낮게 깔려왔다.
어둠 깔릴 무렵, 여자 경찰관 박은순씨가 위성전화로 남편과 통화를 했다. 그녀는 “야, 남편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씩씩하게 전화를 끊더니 마구마구 우는 것이었다. 그러곤 1분에 3달러인 통화료를 여행사 사람에게 내면서 이번엔 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야, 저 나쁜 사람 6달러 벌고 사람 울리고! 나 내일 저 전화기 부숴버리고 말거야!” 거친 농담에 모두 통쾌하게 웃고나서는 저마다 전화통을 빌려서는 텐트 뒤로 가서 소근대다가 조용히 울어댔다. 그렇게 히말라야에서 사람들은 그리움을 배워갔다. 이방인 관광객들은 오리털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고, 포터들은 바위 틈에 모여 몸을 부대끼며 잠이 들었다. 내가 네팔에 태어났더라면 나 또한 저들과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에 몸을 뒤척이다 텐트 밖으로 나갔더랬다. 그날 밤, 은하수가 보이지 않았다.
#4 아이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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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을 더 베이스캠프에 남았다. 고산 적응도 중요했고, 날씨가 중요했다. 그 와중에 애굣덩어리 제인이가 하산했다. 날리는 눈발 속에서 제인이가 유르미 삼촌 등에 업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뒷모습이 한참 동안 눈에 밟혔다. “너가 안 내려가면 삼촌들이 위험해”라는 사랑의 밥차 채성태 사장 한마디에 아이는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소증에 시달리던 가수 황규영(42)씨가 하산했다. 오늘은 고도를 500m 높인 하이캠프가 목표다.
바위지대를 지나, 눈 덮인 능선 끝에 이르니 남궁정부(70)씨가 앉아 있다. 55세 때 지하철 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은 구두 장인 남궁씨는 이후 장애인용 신발을 개발해 지금까지 5만켤레의 구두를 만들었다. 그로 인해 ‘벌떡 일어나 걷게 된’ 장애인 수도 그쯤 된다. 그런데 그가 하산을 하기로 했다. 닥터 신호식씨가 말했다. “고소 적응은 문제 없지만 기력이….” 얼핏 노 장인의 선글라스 아래에 눈물이 비쳤다. 그리고 정상민, 정창영 두 장애인이 발길을 돌렸다. “악천후에 더 이상 대원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셰르파들이 만들어놓은 눈길이 너무 좁아, 그들을 부축하고 걷기에는 무리였다. 대신 상민씨는 고미영 대장에게 가족사진을 넘겼다. 자기를 대신해서라도 꼭 가달라고.
#5 나야칸가의 석양(夕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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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전고투 끝에 4700m 하이캠프에 도착했지만, 모두가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다. 비장애인 1명, 장애인 4명이 포기를 하고 나머지 대원들이 하이캠프에 도착했지만, 성공을 축하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조용히 자기 텐트로 들어가 몸을 누이고 20m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잠시 산보를 하며 우리들은 내일을 기다렸다. 어느틈에 우리는 공동체, 아니 가족이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장애인으로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걸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이렇게 오랜 시간을 부대끼며 지낸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결론은 하나였다. “모두가 오르거나 모두가 내려간다.”
다음날 아침, K2봉 도전을 위해 동계훈련 중이던 선발대 연락이 왔다. “하이캠프2(해발 5300m까지 눈이 허리까지 차 있다”고 했다. 그리고 30분 만에 희망원정대는 하산 결정을 내렸다. 맑았던 한 순간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나야칸가 봉이 가슴 속에 솟구치는 먹먹한 느낌 하나에 모두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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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들은 짐을 꾸렸다. 최고 고도 콘서트라는 한국 기네스 기록에 도전했던 연예인들은 하이캠프에서 앰프와 스피커와 발전기를 설치하고 노래를 했다. 추위에 발전기가 몇번씩 멎어버렸지만, 그 전력은 인간의 음성으로 대신했다. 이지연씨가 말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이제 내려갑니다. 나야칸가? 벌써 다녀왔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만 3박4일 동안 걸어올라왔던 하이캠프에서 칸진곰파 산장까지 하산하는 데 딱 다섯시간 걸렸다. 미리 내려가 있던 ‘가족’들과 재회했고, 그날 밤 파티가 벌어졌다. 거짓말 같겠지만, 그날은 정말 은하수가 쏟아질 듯했다. 연예인 이영범씨가 한구석에서 기도했다. “모두가 무사히 히말라야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이들에게 평화를….” 오래도록 그 기도문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외면했던 나야칸가의 석양(夕陽)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소망도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실패의 기록
글·사진·영상=카트만두 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입력 : 2008.04.19 15:51 / 수정 : 2008.04.19 20:16
가만히 서 있는데도 숨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모자라는 공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해발 4700m, 네팔 히말라야 나야칸가봉(5846m) 하이캠프. 밤새 몰아친 눈보라에 텐트들이 절반은 묻혀 있다. 천지사방에 눈보라가 몰아쳤고,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들 얼굴은 어둡다. 해발 1350m 사베르베시에서 시작했던 8박9일의 산행. 예기치 않은 끝이 예감됐다.
온통 잿빛인 하늘 뒤로 마지막 목적지 나야칸가봉이 숨어 있는데, 등반대장 고미영(42·코오롱스포츠)씨가 선언했다. “?10년 만에 처음 보는 악천후입니다. 전문산악인도 가기 어려운 날씨입니다. 하산(下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까지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왼쪽 팔이 없는 이수미(31)씨, 왼쪽 발이 없는 이지연(23)씨, 그리고 오른쪽 다리가 없는 김진희(41)씨 그리고 그들을 도와 8박9일 동안 히말라야를 걸어온 모든 대원들은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덕담을 던졌다. “고생 많았어요. 여기까지 온 게 어딘데….” 그래도 분위기가 어색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웃자, 웃자!” 동행했던 연예인들이 콘서트를 시작했다. 이영범, 이범학, 방대식, 홍종명, 유승혁, 오은주…. 희망원정대를 위해 만든 곡(曲) ‘너라면 돼’가 히말라야 계곡에 울려퍼졌다. “너라면 돼, 너라면 돼. 너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냐~” 웃자고 했던 원정단장인 류홍규 준장(공군사관학교 부교장)은 하산 도중에 끝내 울었다. “그냥, 사람들이 장하고, 가슴 속에 뭔가 북받쳐서….”
이러저러한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절단장애인 7명이 히말라야에 도전했다. 7세부터 이들을 돕기 위해 따라온 경찰관, 연예인을 비롯한 대원 34명으로 이뤄진 ‘희망원정대’다. 연예인 봉사단체인 사랑의 밥차(대표 정준호)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고 코오롱스포츠가 협찬을, STX가 후원을 해 이뤄진 이번 원정대는 지난달 27일 랑탕히말 지역 나야칸가봉을 목표로 인천을 떠났지만 악천후로 인해 하이캠프에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실패했으되,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이 아니라고. 미완의 도전기, 14박15일 동안 이들이 겪은 행복과 좌절을 기록했다.
#1 출발
<IMG SRC=\"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804/19/2008041900356_0.jpg\" border=0>
산행 첫날인 3월 29일 아침. 해발 1350m 사베르베시에서 원정대가 산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르고 있는 대원들에게 고미영 대장이 말했다. “사점(死點)이라는 게 있습니다. 산을 걷다 보면 숨이 막히고, 도저히 더 걸을 수 없는 시점이지요. 그때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점만 넘기면 그 다음에는 무념무상입니다. 저절로 걸어집니다.” 일행은 ‘죽음의 포인트’를 생각하며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티베트 불교의 만장이 휘날리는데, 아직은 사점이라는 말이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정상민(34)씨는 일찌감치 그 사점을 넘긴 사내였다. 세 살 때였다. “엄마한테 용돈을 받아서 가게로 가다가 트럭이 덮쳤어요. 자빠져서 보니까, 내 다리가 트럭 바퀴 축에 말려들어가 뱅뱅 돌고 있는 거예요. 고함 소리에 엄마가 수건 들고 와서 내 온몸을 싸안고 병원으로 갔어요. 그 다음엔 기억이 없어요.” 이수미(31)씨도 마찬가지. “잡지사 기자였는데, 어느날 버스에서 내리다가 버스가 개문 발차를 한 겁니다. 탁 하고 넘어졌는데, 보니까 내 몸뚱아리는 버스 바깥에 있고, 내 왼쪽 팔이 뒷바퀴에 껴서 저만치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는데!”
두 사람 다 사점을 넘겼지만 이후 그들의 삶은 “웃고 있지만 정말 힘들고”(정상민) “전염병 환자 대하듯 아무도 옆에 오기 꺼려하는”(이수미) 허망한 인생으로 변해버렸다. 상민씨가 말했다. “그래서 히말라야에 온 거예요. 올 초에 첫 아들 웅천이가 태어났는데, 애가 크면 ‘아빠가 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도 가기 어려운 히말라야에 다녀왔다’고 말해줄 겁니다. 아빠가 장애인이면 애도 상실감이 크거든요.” 상민씨가 가족사진을 목에 걸었다. 서른 넷 먹은 사내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산으로 들어갔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계곡 랑탕히말에는 봄꽃이 피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살아남기 위해 땅에 납작 엎드려 피어나나 민들레, 한국 진달래보다 잎이 두꺼운 히말라야 진달래 티카, 그리고 그 사이에 소, 말들이 갈긴 똥이 군데군데 누워 있었다.
희망원정대 최연소 대원인 손제인(7). 태어날 때부터 두 발과 양손 손가락이 없는 제인이는 소똥이 보이면 “소똥 조심”, 바위지대가 나타나면 “바위 조심”을 외치며 어른들을 즐겁게 했다. 원정대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인이를 걱정했다. 해발 3000m를 넘으면 귀신처럼 나타나는 고소증, 그리고 행여 있을 지 모를 사고에 제인이는 언제나 제1의 관리대상이다. 자기 발로 걷고, 말을 타고, 그리고 삼촌처럼 보살펴준 포터 유르미(23)씨의 도움으로 제인이는 해발 4200m 베이스캠프까지 올랐다. “맥박수가 조금 높아, 더 이상은 어렵다”는 팀닥터 신호식씨의 판단으로 하산 결정이 떨어지자, 제인이는 “왜 나만 내려가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해발 3700m 산장에서 재회한 제인이는 “삼촌들 어서 와. 소똥 조심했지?”하며 우리를 반겼다.
#2 히말라야를 닮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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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길은 험난했다. 완만했던 숲길은 사흘 만에 바윗길로 변했고 해발 2000m 지점에서 원정대는 목이 아플 정도로 경사가 진 고갯길을 만났다. 모두 겁에 질렸다. 특전사 출신인 경찰관 김철수(42)씨도 “와, 이걸 어떻게…”하고 내뱉었다. 그는 왼쪽 다리가 없는 청년 정창영(27·사회복지사)씨를 부축하는 멘토다. 300m 정도 되는 그 고갯길, 한 시간 걸렸다. 그 사이에 의족과 맞닿아 있던 창영씨 다리는 피투성이가 됐다. 고개 꼭대기 찻집에 앉으니 설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웅장하고, 위대한 해발 2375m 찻집에서 장애인들의 상처 부위는 그들의 의지와 경치의 위대함에 비례해 망가지고 있었다. 그런 창영씨가 말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할 때, 아이들에게 장애인을 설명하면서도 내 상처를 보여주지 못했어요. 돌아가면, 글쎄요. 좀 다를 거 같은데요?” 그렇게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히말라야에 빠져들었고, 어느덧 백두산보다 높은 해발 3008m 고다타벨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조금 더 큰 자신감과 조금 더 힘든 여정을 거쳐 해발 3400m 랑탕 마을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히말라야 설국(雪國) 풍경이 시작됐다. 그리고 다음날, 정말 어렵게 고도를 300m 높여 칸진곰파 마을에 닿았다. 원정대 대원들과 내기를 벌인 포터 얄부(28)씨가 마을 앞에 있는 4200m짜리 칸진리 소봉을 40분 30초 만에 정복하고 내려왔다. 일반인은 6시간이 걸리는 코스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그를 기다리던 우리들은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상금 100달러를 선물했다. 그날 밤부터 폭설이 쏟아졌다. 실무를 맡았던 트레킹 여행사 유재수 상무는 “이곳은 밤새 눈이 오고 낮에는 햇볕에 녹는 곳”이라고 했다. 폭설은 그런데 일주일 동안 멎지 않았다.
#3 은하수가 보이지 않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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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적응을 마친 이틀 뒤 고미영 대장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제부터 귀찮고 예민해지고 싸우게 됩니다. 서로를 먼저 생각해주십시오.” 공기가 희박해지고 몸이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예민해져갔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도움을 받는 사람도. 식사 투정이 늘었고, 일정을 두고 대립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현지 주민들이 어렵게 산악 소인 야크 고기를 내놨지만, 대부분 식사를 물렸다. “미리 포기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결의를 다진 뒤, 한 순간 솟아오른 태양빛을 받으며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로 출발했다. 천지사방이 흰눈을 뒤집어쓰고 반짝였다. 티베트 불교 장식탑인 마니추르를 지나 설산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다.
“이 고개만 넘으면 넓은 능선입니다. 조금만 힘냅시다.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시고요.” 고미영 대장이 지시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 설산 사면이 하늘까지 솟구쳐 있다. “한 40도?” 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측량했지만, 40도 경사가 어디 아이 이름인가. 미리 셰르파들이 눈길을 만들어놓았지만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지연씨가 말했다. “그래도 가야죠.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경찰관 멘토 조서희(41)씨 손을 붙잡고 포터의 도움을 받으며 또박또박 하늘로 올라갔다. 의족과 맞닿은 지연씨 발목은 이미 곪아 있다. 지연씨는 능선을 앞에 두고 눈밭에 쓰러졌다. “…하늘 바라봤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제인이의 포터 유르미씨. 난감해하는 사람들 눈치를 보던 그가 제인이를 들쳐업더니 비탈을 뛰어오른다. 불길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해내는 소방관처럼, 그는 우리들 눈에 영웅으로 보였다. 그를 따라 오른 능선에서, 일찌감치 미리 출발했던 김진희씨가 쓰러져 있었다. 그날 아침 지급 받은 식량은 삶은 달걀 2개와 육포 몇 조각과 물 한 통. 그렇게 쓰러지고, 걷고, 하늘 한번 구경하며 우리들은 결국 해가 떨어지기 전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고, 연예인들은 4200m 설산에서 유쾌한 콘서트를 열었다. 뒤늦게 도착한 김진희씨를 가수 이범학(42)씨가 부둥켜안았다. 캠프 저 아래 강이 흘렀다. 흰 구름이 낮게 깔려왔다.
어둠 깔릴 무렵, 여자 경찰관 박은순씨가 위성전화로 남편과 통화를 했다. 그녀는 “야, 남편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씩씩하게 전화를 끊더니 마구마구 우는 것이었다. 그러곤 1분에 3달러인 통화료를 여행사 사람에게 내면서 이번엔 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야, 저 나쁜 사람 6달러 벌고 사람 울리고! 나 내일 저 전화기 부숴버리고 말거야!” 거친 농담에 모두 통쾌하게 웃고나서는 저마다 전화통을 빌려서는 텐트 뒤로 가서 소근대다가 조용히 울어댔다. 그렇게 히말라야에서 사람들은 그리움을 배워갔다. 이방인 관광객들은 오리털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고, 포터들은 바위 틈에 모여 몸을 부대끼며 잠이 들었다. 내가 네팔에 태어났더라면 나 또한 저들과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에 몸을 뒤척이다 텐트 밖으로 나갔더랬다. 그날 밤, 은하수가 보이지 않았다.
#4 아이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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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을 더 베이스캠프에 남았다. 고산 적응도 중요했고, 날씨가 중요했다. 그 와중에 애굣덩어리 제인이가 하산했다. 날리는 눈발 속에서 제인이가 유르미 삼촌 등에 업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뒷모습이 한참 동안 눈에 밟혔다. “너가 안 내려가면 삼촌들이 위험해”라는 사랑의 밥차 채성태 사장 한마디에 아이는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소증에 시달리던 가수 황규영(42)씨가 하산했다. 오늘은 고도를 500m 높인 하이캠프가 목표다.
바위지대를 지나, 눈 덮인 능선 끝에 이르니 남궁정부(70)씨가 앉아 있다. 55세 때 지하철 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은 구두 장인 남궁씨는 이후 장애인용 신발을 개발해 지금까지 5만켤레의 구두를 만들었다. 그로 인해 ‘벌떡 일어나 걷게 된’ 장애인 수도 그쯤 된다. 그런데 그가 하산을 하기로 했다. 닥터 신호식씨가 말했다. “고소 적응은 문제 없지만 기력이….” 얼핏 노 장인의 선글라스 아래에 눈물이 비쳤다. 그리고 정상민, 정창영 두 장애인이 발길을 돌렸다. “악천후에 더 이상 대원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셰르파들이 만들어놓은 눈길이 너무 좁아, 그들을 부축하고 걷기에는 무리였다. 대신 상민씨는 고미영 대장에게 가족사진을 넘겼다. 자기를 대신해서라도 꼭 가달라고.
#5 나야칸가의 석양(夕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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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전고투 끝에 4700m 하이캠프에 도착했지만, 모두가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다. 비장애인 1명, 장애인 4명이 포기를 하고 나머지 대원들이 하이캠프에 도착했지만, 성공을 축하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조용히 자기 텐트로 들어가 몸을 누이고 20m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잠시 산보를 하며 우리들은 내일을 기다렸다. 어느틈에 우리는 공동체, 아니 가족이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장애인으로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걸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이렇게 오랜 시간을 부대끼며 지낸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결론은 하나였다. “모두가 오르거나 모두가 내려간다.”
다음날 아침, K2봉 도전을 위해 동계훈련 중이던 선발대 연락이 왔다. “하이캠프2(해발 5300m까지 눈이 허리까지 차 있다”고 했다. 그리고 30분 만에 희망원정대는 하산 결정을 내렸다. 맑았던 한 순간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나야칸가 봉이 가슴 속에 솟구치는 먹먹한 느낌 하나에 모두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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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들은 짐을 꾸렸다. 최고 고도 콘서트라는 한국 기네스 기록에 도전했던 연예인들은 하이캠프에서 앰프와 스피커와 발전기를 설치하고 노래를 했다. 추위에 발전기가 몇번씩 멎어버렸지만, 그 전력은 인간의 음성으로 대신했다. 이지연씨가 말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이제 내려갑니다. 나야칸가? 벌써 다녀왔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만 3박4일 동안 걸어올라왔던 하이캠프에서 칸진곰파 산장까지 하산하는 데 딱 다섯시간 걸렸다. 미리 내려가 있던 ‘가족’들과 재회했고, 그날 밤 파티가 벌어졌다. 거짓말 같겠지만, 그날은 정말 은하수가 쏟아질 듯했다. 연예인 이영범씨가 한구석에서 기도했다. “모두가 무사히 히말라야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이들에게 평화를….” 오래도록 그 기도문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외면했던 나야칸가의 석양(夕陽)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소망도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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