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두려운 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들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한다. 두려움을 억제하지 못하면 조그마한 환상 따위를 무서운 괴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반면 이를 악물고 "그래, 난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하면,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해내고 만다. 후지모토가 꼭 그랬다. 후지모토는 세계적인 체조선수였다. 일본 대표로 참가한 올림픽 대회에서 그의 팀은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다투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이 젊음을 바쳐 피나는 훈련을 해왔다는 사실과, 팀 동료들도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링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쳐 보이고 착지했다. 그러나 착지하는 순간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고, 고통을 호소하며 매트위에 쓰러졌다. 그날 밤 동료 선수들은 병원으로 찾아와 상심한 그를 위로해 주었다. 다음날, 경기장 전광판에 후지모토의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선수 출입구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윽고 링 연기를 해보이기 위해 기구에 올랐다. 관중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죽이고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후지모토는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링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그런 몸으로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연기를 하며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후지모토는 그런 연기가 관중의 박수를 받거나 금메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겠지만. 그 대신 칼로 찌르는듯한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착지할 때의 충격을 붕대를 감은 다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붕대를 감은 다리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날밤 병원에서 곰곰이 생각한 결과, 팀에 금메달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최하 9.5 이상의 점수를 얻어야 했다. 그는 연기를 시작했고, 링에서 멋진 공중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관중들과 심사위원단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마침내 착지를 위해 그는 링에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두 번 몸을 비튼 후 다시 세 번 공중돌기를 했고, 목표물에 정확히 박히는 화살처럼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며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의 연기가 모두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는 곧 바닥에 쓰러졌고 팀동료들이 달려와서 부축하여 내려왔다. 이윽고 전광판에 9.5 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그의 팀이 금메달을 따게 된 것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군요. 하지만 이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나니 그 고통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후지모토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스러울수록 그 끝에 얻은 영광은 더 빛나는 법이다!" 댄 클라크 지음 <죽도록 원하는가? 그러면 해낼 수 있다>에서
3. 늦깎이는 없다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바트,
네팔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오를 때
공통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정상까지 오르려면 반드시 자기 속도로 가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느리고 답답하게 보여도 정상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체력 좋은 사람이 뛰어 오르는 것을 보고 같이 뛰면
꼭대기까지절대로 갈수가 없다.
반대로 어린이나 노약자들의 속도로 가면
반도 못가서 지치고 만다.
억울하지 않은가.
자기 속도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한 발짝씩 부단히 올라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쓸데없이 남과 비교하며 체력과 시간을 낭비하느라 꼭대기에
오르지 못한다면.
물론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인생의 속도와
일정표가 있다.
언제까지 공부하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가져서 돈을 벌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노후를 어떻게 보내야 한다는.
이것에 딱 맞추어서 인생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해야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모든 사람들이 편하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보편적인 시간표와
자기 것을 대조하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한다.
나는 벌써 늦은 게 아닐까,내 기회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의 인생에서 이 표준 시간표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오히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간표가 더 소중한 것 아닐까?
요즘 베이징에는 어디를 가나 탐스러운 국화가 한창이다.
제철을 만난 국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저 국화는 묵묵히 때를 기다릴 줄 아는구나.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역시 봄에 피는 복숭아꽃이나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꽃보다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며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매미 소리가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드디어 자기의 차례가 돌아온 지금,국화는 오래 준비해온
그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아무도 가을에 피는 국화를 보고 늦깎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쳐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때문이다.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개나리나 한여름 붉은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고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 한비야의 ’中國見聞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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