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자유게시판

세계일보[이사람의 삶] 서울시립대 절단장애인 사서 신명진씨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9건 조회 10,021회 작성일 11-04-25 10:28

본문

어린시절 소금운반 기차에 깔려 두다리와 오른팔 일부 잃어
그때부터 ‘덤’ 이라 부르는 인생 시작
20110424001920
  • 소년의 집은 바람이 불면 짭짤한 소금 내음이 나던 인천 소래포구 곁이었다. 정차 중인 소금 운반 기차 위에서 동네 형들과 함께 놀던 어느 날, 기차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들은 얼른 기차에서 뛰어내렸지만 겁에 질린 소년은 그러지 못했다. 로프를 잡고 버틴 지 얼마가 지났을까. 소년의 작은 몸은 순식간에 기차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긴 수술 끝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두 다리와 한쪽 팔의 3분의 1이 떨어져 나갔다. 스스로 ‘덤’이라고 부르는 인생이 그때부터 시작됐다.어머니는 매일 소년을 업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어떻게 하면 같이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를 오히려 소년이 위로했다. “엄마, 울지 마. 나는 잘 살 거야.” 소년의 어머니는 당시를 떠올리며 “내가 절망을 보고 있을 때 아들은 희망을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30대 청년이 된 소년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 꿈을 꾸다

    절단장애인 신명진(34)씨를 13일 봄 내음이 가득한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서울시청 소속 공무원이 된 그는 2009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현실적인 아이’였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꿈이 뭐냐는 물음에 친구들이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들 때 그는 ‘약사’라고 답했다. “약사라면 앉아서도 일할 수 있잖아요. 제 몸이 불편하고, 남들과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걸 어릴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거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그의 꿈은 조금씩 더욱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대입을 앞두고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미래를 공무원으로 정하고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일반 기업에 입사하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신씨는 스스로 한계를 긋는 방법을 먼저 체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이기만 하던 그가 다시 꿈을 꾸게 된 건 대학 졸업 후 공무원이 되기 전 잠시 다녔던 회사 동료의 영향이 컸다.

    “그분이 수영을 하더라고요. 장애가 있는 나에게 운동은 ‘보는 것’으로만 여겼는데 조금 충격을 받았죠. 그때까지 전 스스로 갇혀 있었던 거예요.”

    2001년부터 그도 용기를 내 수영을 시작했다. 물에 뜨는 것은 물론, 의족을 벗은 몸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었다. “처음엔 25m 레인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과연 저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되더라고요. ‘나도 정말 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3년 처음 장애인전국체전에 출전한 그는 2009년 금메달, 2010년에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제 그에게는 ‘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크죠. 그러나 수영을 하고 난 뒤에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됐어요. 사고가 열리게 된 거죠.”

    신명진씨는 “우리나라에는 아직 밖에 나오지조차 못하는 장애인들이 많다”며 “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오른팔과 양 다리를 잃고도 올해 안에 킬리만자로 등반을 계획 중인 신씨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송원영 기자
    # 또 다른 도전, ‘산’

    신씨는 싫어하는 것은 세 가지. 눈과 계단, 그리고 산이다. 두 다리가 모두 의족인 데다 한쪽 팔이 온전치 않아 균형을 잡기가 수월치 않다. 작은 돌부리 하나가 그에게는 큰 위험이다.

    하지만 2009년 백두산 등정에 성공했다. 절단장애인협회가 추진한 백두산 희망원정대원 10명은 경기지방경찰청 소속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천지를 두 눈에 담았다. “원래 뒷산조차 오를 생각을 못했는데, 인생의 첫 번째 산이 백두산이었던 거죠.”

    산에 오른 것은 신씨 인생에서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아주 큰 경험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오래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해낸 거죠.”

    당시 인천시교육청 기능직 공무원이었던 신씨는 이후 단 1명 뽑는 서울시청 중증장애인 특채에 합격했다.

    그는 “백두산에서 좋은 정기를 받아 온 덕분인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등산의 묘미를 알게 된 그는 2010년에도 몽골의 체체궁산(2256m)에 올랐다. 후원자 문제로 잠정 중단되긴 했지만, 올해에는 킬리만자로 등반 계획도 세웠다.

    등산을 ‘내가 살아간다’는 증거라고 한 신씨. “저보다 장애가 경증이면서도 사회에 나오길 두려워하는 분들, 혹은 장애인은 아니지만 절망을 느끼는 분들께 희망이 되고 싶다”고 했다.

    2009년 백두산 희망원정대에 참여한 신명진씨가 산을 오르는 도중 휴식하면서 의족 한쪽을 들어보이고 있다.
    <한국절단장애인협회 제공>
    # 세상 밖으로 나오다

    인천시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2003년 무렵, 그의 하루 첫 일과는 신문 기사를 잘라 스크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수가 거치적거렸다. 의수를 낀 채로는 자를 고정하기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일하는 동안 의수를 빼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 모습을 보고 도서관에 온 사람들이 많이 놀라셨어요. 그런데 3일 정도가 지나니까 익숙해 하시더라고요.”

    용기를 낸 그는 일종의 실험을 시작했다. 도서관 밖에서도 의수를 빼고 생활한 것. 그는 “처음에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보곤 했는데, 매일 비슷한 시간에 타다 보니 사람들도 익숙해 했다”며 “며칠 지나니까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신씨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거나 외국으로 이민가는 장애인들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낯선 모습을 보고 쳐다보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라요. 장애인들도 사람들이 낯설어하지 않게 거리로 많이 나와야죠.”

    지금도 평소에는 의수를 뺀 채 인천 집에서 직장이 있는 동대문구까지 매일 2시간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다닌다.

    동네에선 두 다리에 의족을 낀 채 반바지를 입고 다니기도 한다. 의족을 감추려 매일 긴 바지만 입고 다니던 때와 비교하면 놀랄 만한 변화다. 신씨는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면서 “지금은 그 벽을 스스로 깼다. ‘날 그런 시선으로 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여는 게 쉽다”고 강조했다.

    신명진씨가 2010년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몽골의 체체궁산에 오르고 있다.
    <한국절단장애인협회 제공>
    # 다시, 희망을 말하다

    장애로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이 때론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남에게 각인되기 쉽거든요. 저는 기억 못하는 학생들이 먼저 인사하는 경우도 많아요.” 장애 극복을 위한 긍정적 사고가 그의 삶에 활력소가 된 듯하다.

    “제가 커피 한 잔을 가져다줘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 준 것보다 몇 배로 고마워하곤 해요. 장애가 있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군요.”

    수영, 볼링,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신씨는 스스로의 삶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다 하고 살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라고 남보다 못나거나 부족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내가 마음만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장애인들이 좀 더 사회에 진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아요. 불편해서 못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갇힌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들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져야 해요.” 그는 “뭐가, 얼마나 힘든지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며 “밖으로 나와서 ‘이런 점이 힘들다’고 말해야 사회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의 꿈은 ‘오체불만족’의 오토다케 히로타다처럼 책이나 대중강연을 통해 희망과 꿈을 전해주는 것.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어머니께 희망을 전하던 소년은 30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을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댓글목록

유지삼님의 댓글

유지삼 작성일

언제나 멋진 명진이 아우 ~화이팅``````````~

이옥자님의 댓글

이옥자 작성일

언제나 환한 미소가 멋져 ~~~

김성훈님의 댓글

김성훈 작성일

멋지다~~후후^^

최진근님의 댓글

최진근 작성일

세삼 느껴지는게 많은 기사네요 ㅎㅅㅎ

김유태님의 댓글

김유태 작성일

저..왠만해서 로그인 못하는데..오늘은 기사읽어보니 멋지네요..

박유환님의 댓글

박유환 작성일

저에게 많은 도전의 힘을 주세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신명진님의 댓글

신명진 작성일

에이~ 다덜 저에대해 아시잖아요~ 새삼스럽게.. 민망합니다 ^^;;

주명희님의 댓글

주명희 작성일

민망하긴... 즐기면서... ㅋㅋㅋ 어쨌거나 멋져 멋져!!!

박순선님의 댓글

박순선 작성일

명진아..  살좀 빼~~~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