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3종’ 장애인 국가대표 이준하 “나는 아시아 최강 ‘아이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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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865회 작성일 13-07-26 11:48본문
입력 : 2013.07.19 17:30 | 수정 : 2013.07.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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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인3종 경기 선수 이준하/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이준하씨는, 놀랍게도 장애인이다. 철인3종 경기 선수에게는 심장과도 같은 오른쪽 다리가 없는 절단 장애인이다. 이씨는 의족을 빼고 팔과 상체의 힘만으로 수영을 한 후 육지로 올라와 사이클과 마라톤을 위해 오른쪽 다리에 딱딱한 의족을 착용하고 달린다.
이 선수는 지난 4월 필리핀 수빅에서 열린 ‘2013 철인3종 경기 아시안컵’에서 ‘파라 트라이애슬론 Tti-5’(장애인 부문) 우승을 거머쥐며, 이 부문에서 아시아 최강의 철인으로 인정받았다. 이 우승으로 이씨는 9월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2013 철인3종 경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대표선수’로 참가할 예정이다. 이준하씨를 7월 4일 경북 포항에서 만났다.
이씨에게 20년 전 잘라낸 오른쪽 다리 이야기를 물었다. 그는 “사고였다”며 “절단 장애인이 되면 누구나 그렇듯 그땐 상실감도 컸고 세상에 대한 원망도 많았다”고 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3년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주말에 학교에서 축제 준비를 하던 선생님을 도와준 후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어요.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가 저를 들이받은 거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입원 한 달째쯤 패혈증이 일어났어요.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진단을 받았지요. ‘다리를 자르는 것’에 대해 저에겐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던 거지요.”
1993년 불과 열여섯 살 이준하는 그렇게 오른쪽 다리를 영원히 잃었다. 그는 “수술 후 눈을 뜬 순간부터 그 상실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속된 말로 TV에나 등장할 것 같은 다리 절단 장애인이 현실의 제 모습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죠. 병원에 있을 땐 주변 사람들 모두 장애를 갖고 있거나 아픈 환자들이라 그나마 조금 나았어요. 근데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만 장애인이고 제 주변엔 모두 정상인이잖아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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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수빅에서 열린 ‘2013 철인3종 경기 아시안컵’ 참가 당시.
이준하씨의 다리가 사라지며 그의 꿈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꼬맹이 때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한 가지 꿈만 꾸며 살았습니다. 사고 직전까지 공군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했었죠. 사관학교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지원할 수 있었거든요. 공군사관학교 입학시험 한 달여를 앞두고 다리를 잘랐으니…. 그땐 다리가 없어졌다는 육체적 충격도 컸지만, 꿈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없는 절단장애자가 된 현실을 이씨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그때부터의 인생은 ‘대충 사는 것’이었다”며 “열심히 살아야 할 꿈, 목표, 열정 모든 게 없어졌기에 그냥 되는 대로 살았다”고 했다. 그런 무료하고 무의미한 삶이 10년이나 이어졌다.
“다리 한쪽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지요. 시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또 다른 분위기였어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저 스스로도 제 장애에 대해 쉬쉬했지요. 장애라는 게 부끄럽고 싫어 장애인등록을 10년 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2003년 둘째 누나와 결혼한 매형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했다. “매형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눈에 스무 살을 갓 넘긴 젊디젊은 막내 처남이란 놈이 장애를 핑계로 꿈도, 목표도 없이 설렁설렁 사는 모습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해 보였겠어요. 매형이 어느 날 갑자기 부르더니 ‘운동을 해보자’고 했지요. 그게 바로 철인3종 경기였어요.” 이씨는 둘째 매형이 철인3종 경기가 한국에 도입된 초창기부터 이 운동을 해온 초기 멤버라고 했다. 자신이 하던 운동을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살던 이준하씨에게 권했던 것이다.
“매형에게 대놓고 ‘오른쪽 다리가 없는 내가 철인3종 경기를 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안 한다. 못한다’고 잘라 말했죠. 저만 반대한 게 아니었어요. 부모님은 물론 주변 친구들도 매형에게 ‘다치면 어떻게 하냐. 도대체 왜 그러냐’고 심하게 반대했지요. 심지어 의족을 만드는 보조기 회사 관계자와 담당 의사까지 ‘철인3종 경기를 하면 2차 장애가 생길 수 있어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100명 중 자신을 포함한 99명이 “안 된다. 못 한다”며 반대했고, 딱 한 명 매형만이 “된다.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이겼다. 1년을 매형이 보기도 싫었을 만큼 옥신각신하다가 이씨가 먼저 지쳤다. “네, 그럼 한번 해보긴 하지요”라고 했다.
처음에는 매형이 참가한 경기의 응원을 다녔다. 그러다 점점 철인3종 경기의 매력에 빠졌다. “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쉼 없이 이어 하며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나도 수퍼맨 같은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자기 최면에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그는 철인3종 경기에 나서기 전인 2005년, 수원 전국장애인수영대회에 먼저 참가했다. 사관생도를 꿈꿨을 만큼 운동신경이 발달했고, 집중력도 좋았기 때문인지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2등을 차지했다. 그는 이 대회가 “‘어 이거 봐라, 진짜 되네’라는 자신감을 키워줬다”고 했다.
1년 후 2006년, 이씨는 매형이 타던 자전거를 빌려 대구시장배 철인3종 경기에 참가하며 공식 데뷔했다. 정상인들과 같은 코스를, 같은 조건으로 함께 뛴 그의 성적은 최하위권이었다. 그럼에도 이씨는 이 대회가 37년의 삶에서 절대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국제대회 표준인 올림픽코스(수영 15㎞, 사이클 40㎞, 마라톤 10㎞)의 대회였습니다. 코스 기록을 인정받으려면 3시간30분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 시간을 넘기면 공식 기록 없이 완주만 인정해 주지요. 그런데 저는 3시간30분은 고사하고 4시간40분이 넘어 골인을 했습니다. 사실상 꼴찌지요. 보통 앞서 들어온 선수들이 하위권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결승선 현장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해산하지요. 그런데 그날은 대회에 참가 했던 모든 선수가 결승선에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오는 그 순간, 앞서 들어왔던 철인 선수들이 결승선을 에워싸고 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철인들의 응원 소리를 들으면서 골인하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그는 그 순간 철인3종 경기가 새롭게 이루어 가야 할 꿈이 돼 있었다고 했다. 이후 꾸준히 대회에 참가하며 기록을 단축해 갔다. 이준하씨는 철인3종 경기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40여번의 대회를 완주했다. 슬럼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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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무주 그란폰도대회
2008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아들을 응원했던 아버지가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참가한 2009년 대구시장배 대회 때 왠지 ‘하고 싶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더군요. 늘 대회 결승선에서 가장 먼저 저를 맞아주던 아버지가 없다는 현실이 제 삶에 또 다른 상실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 대회 이후 한동안 철인3종 경기를 쉬었습니다.”
그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년이 되지 않아 다시 일어나 대회에 참가했다. 기록도 빠르게 좋아졌다. 정상인과 동일한 조건으로 함께 뛰는 올림픽코스를 3시간3분까지 단축했다. 2011년부터는 국제 대회에 참가하며 올림픽코스의 절반인 스프린트 코스(수영 750m, 사이클 20㎞, 마라톤 5㎞) 부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스프린트 코스(장애인 부문)에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 최강자로 올라섰다. 그는 ‘아시아 최강이나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라는 수식어와 평가가 부담스럽고 쑥스럽다고 했다.
“냉정하게 평가한 실력에 비해 과분하게 높게, 또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그랜드파이널’이란 세계 대회에 참가했었지요. 미국과 캐나다, 유럽 선수들과 겨루는데 철인3종 경기에서 한국이란 무대가 얼마나 좁은지 절감했습니다. 선수 수도 절대적으로 적고, 수준 차이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대회였죠. 사실 그때 만난 진짜 뛰어난 수준의 많은 세계적 선수들을 보며 지금도 꿈을 키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 꿈을 위해 더 열심히 뛰고, 운동하고 있는 중이지요.”
이씨는 오는 9월 참가하는 ‘2013년 런던 철인3종 경기 세계선수권’에서 10위 이내 성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목표가 꿈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말 처음 착용한 마라톤 경기용 의족 ‘치타풋’에 적응하고 있고, 기록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
인터뷰 말미 이준하씨는 “장애를 가진 후배들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후배들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게끔 먼저 길을 열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경기가 끝나면 잘라낸 다리의 환부에 마치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밀려옵니다. 딱딱한 의족을 달고 3시간을 넘게 달린 충격이 고스란히 잘라낸 다리 환부를 짓누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계속 달리는 이유는 그 고통보다 ‘해냈다’ ‘할 수 있다’는 짜릿함이 주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두고 사람들은 ‘조금 불편할 뿐이지 이겨 내지 못할 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그저 희망을 주기 위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그 기쁨이 저를 계속 달리게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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